북한 방문 이야기 이번 북한방문은 그간 은혜교회. G.M.I에서 의료품을 보내고 고아원과 국수공장을 후원한 것에 감사하며 장애자 재활원 건축후원을 위해 방문하였다. 은혜교회, GMI 이름으로 1998년부터 시작한 구제사역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올해에도 두 개의 콘테이너에 의료기구와 의약품을 남포로 보내졌다. 이번에 방문한 참석자는 은혜교회. 서울은혜교회. 마이아미 임마누엘교회. 예수사랑 은혜교회. 갈보리교회. 시카고 헤브론교회. 시라큐스 온누리교회. C.C.C,, 남가주 산정현 교회등 35명이 동행하였다.
9월23일 금요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북경에 도착. 그곳에서 은혜교회 축구팀과 남가주 목사협의회 여러 목사님들과 만나고 저녁에는 한국에서 나온 지사원과 유학생 중심으로 모이는 21세기교회에서 한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셨다.
24일 토요일 아침 우리는 북경공항으로 나가서 말로만 듣던 평양 고려민항을 탔다. 이 비행기는 일주일에 2번 북경에서 평양을 왕복한다. 비행기 안에서 노동신문과 조선이라는 잡지를 보니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맞이하여 모든 인민은 힘을 모아 기념일을 성공시키자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기내에서 서비스하여 먹는 7-up은 단물이라고 하여 먹어보았는데 설탕물이었다. 비행기는 낡아서 굉장한 소음을 내면서 순안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말로만 듣던 평양에 온 것이다. 순안비행장에 호기심과 이유 없는 두려움으로 입국심사대 앞에 섰다. 소련에 90대초 처음 선교 갔었을 때의 비슷한 감정의 묘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말이 없고 눈동자만 움직여 서로를 보는 눈초리는 그곳 분위기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세관통과를 하고 순안비행장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는 길에 개선문을 지나 조선혁명 박물관으로 갔다. 25M의 큰 동상과 좌우의 조각들은 혁명역사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하나하나의 조각들은 호전적이고 용감성 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우리를 인도하는 북한안내원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니 북한의 분위기를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평양시내의 대동강과 주체탑. 김일성 광장, 양각도 호텔 등이 보였다. 우리는 평양시내에 있는 해방산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북한은 외국 회폐 사용을 유로화로 하고 있다. 미국화폐가 있으면 먼저 인민폐를 유로화로 계산하고 다시 미국화폐 환산 한다. 호텔은 하루에 일인당 50유로이고 아침식사가 포함 된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에 고려호텔 식당으로 갔다. 냉면과 빈대떡. 토장국. 등 도착하여 첫 식사를 했다. 이곳의 음식 맛은 담백하고 맛이 있다.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조미료에 간장. 된장 같은 기본조미료가 오래 동안 묵혀 사용한다고 한다.
25일 주일아침. 우리는 칠골 교회에서 특송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아침에 호텔에서 “순교자의 길” 복음찬송을 연습하는데 호텔이 시끄러우니 장소를 옮겨 달라고 하여 만경대 밑에 위치한 김일성주석의 생가를 구경하고 언덕위에 만경대에 올라 말로만 들어보던, 셔먼호를 탄 선교사님의 피가 흘렸던 대동강을 내려보며 찬양 연습을 했다. 봉수교회는 확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도착한 칠골교회는 약 100여명의 교인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있고 카나다에서 온 외국인들도 있었다. 우리는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고 김광신목사님의 20분간의 인사말씀과 우리들의 특송이 있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울면서 찬양했고 그 감정은 긴 시간의 여운을 남겼다. 칠골교인들은 열열히 박수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한사람 한사람 손을 잡고 인사를 하였다. 예배후 우리는 G.M.I에서 1996년부터 운영하는 팔골 국수공장을 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공장책임자와 지배인 분들이 나와서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우리가 다 교회 다니는 것을 밝혀서 알고 있었다.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1996년 극심한 식량난으로 사람들이 굶주릴 때 그 당시 김광신 목사님께서 결단을 내려 평양에 국수공장을 세운것이다. 이곳서 만들어진 국수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 국수공장을 알고 있다. 성도님들의 후원이 이곳에서 수십만의 사람을 살렸다. 우리는 공장에서 직접 뽑아 낸 국수를 맞보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26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모두들 대동강 가를 산책하였다. 오염이 안 되고 차량들이 거의 없어서 공기는 폐 속 깊이 들어오는 느낌이다. 아침식사는 죽과 빵이 나오는데 꼬박 꼬박 세끼를 먹어도 끈기 있는 음식이 없어서인지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 대동강을 끼고 평양 중심에 위치한 김일성 주석의 70세 생일을 맞이하여 지은 170M 높이의 주체탑을 보았다. 1948년 우리나라 통일을 두고 김구선생과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쑥섬을 보고 대동강 변에 1968년 미국 함정 푸에블로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동해상에서 납포 되었는데 대동강에 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이곳에 1866년 제너널 셔만호의 비문이 있었다. 이곳은 영국의 하노브 교회에서 파송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님이 제너넬셔만호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붙잡혀서 참수형을 당한 곳으로 우리나라 교회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곳이다. 참수당하면서 목 자르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준 것이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저녁에 우리는 15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5.1경기장에서 아리랑공연을 참관하였다. 중.고 학생들 2만 명이 9개월 동안 연습하여 카드섹션을 하고 일반인들의 마스게임은 몇 만명이 동원 된 것 같다. 마스게임과 카드섹션의 내용은 일제치하에 만주벌판으로 피난길을 떠나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승리하여 돌아와서 조국건설과 미래의 컴퓨터 산업, 식생활개선. 농업개발 등을 이뤄 군사, 정치 경제의 강성대국을 이루 간다는 내용이다. 카드섹션에는“ 조국해방 60 돐 만세, 수령님그리움으로 사무치는 이강산,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 장군 만세”등을 볼 수 있었다. 5-7살 된 아린아이들의 “우리는 조국에서 부러움이 없어라”라고 외치는 소리는 표정이 없었다. 27일 화요일 우리는 묘향산으로 갔다. 우리나라 조선의 5대 명산인 묘향산에는 국제친선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은 김일성주석이 살아있을 때 외국 사절단들이 가지고 온 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가야하는 곳이다. 묘향산은 잣나무와 도토리나무, 산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고 한다.
28일 수요일 평양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서해 갑문이 나온다. 남포로 내려가는 도로는 김일성주석의 생일을 맞춘 42.15 KM 길이의 거리이다. 1998-2000년에 공사한 도로로 남녀 인원이 년 5만 명이 동원되어 망치로 돌을 쪼개고 마대로 나르고 하여 이룩한 10차선의 대 작업으로 이름하여 청년영웅 도로라고 부른다. 남포 항구는 남쪽에서 오는 모든 화물이 도착하는 곳으로 우리가 보내는 컨테이너도 이곳을 통하여 전달된다.
29일 목요일 남쪽으로 176KM에 있는 개성 판문점을 방문했다. 1953년 정전협정 장소로 전쟁을 마무리한곳으로 그 당시의 자료와 건물들을 돌아보았다. 6.25 전쟁은 유엔군의 북침과 항복했다는 안내원의 설명 비문이 있다. 우리는 남쪽의 판문각이 있는 바로 경계선 까지 가서 남.북 협상하는 공동구역 안의 집으로 들어가서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다. 수많은 인명피해와 건물의 파괴, 이산가족의 아픔이 있는 경계선에서 우리는 통일을 하루빨리 기원해본다. 돌아오는 길에 개성에서 내려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피가 묻어있는 선죽교다리를 보고 성균관을 돌아보며 옛날 선비들의 과거를 준비하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고려의 태조 왕건의 묘와 고려청자 박물관을 관람했다. 9월23일 금요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북경에 도착. 그곳에서 은혜교회 축구팀과 남가주 목사협의회 여러 목사님들과 만나고 저녁에는 한국에서 나온 지사원과 유학생 중심으로 모이는 21세기교회에서 한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셨다.
24일 토요일 아침 우리는 북경공항으로 나가서 말로만 듣던 평양 고려민항을 탔다. 이 비행기는 일주일에 2번 북경에서 평양을 왕복한다. 비행기 안에서 노동신문과 조선이라는 잡지를 보니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맞이하여 모든 인민은 힘을 모아 기념일을 성공시키자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기내에서 서비스하여 먹는 7-up은 단물이라고 하여 먹어보았는데 설탕물이었다. 비행기는 낡아서 굉장한 소음을 내면서 순안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말로만 듣던 평양에 온 것이다. 순안비행장에 호기심과 이유 없는 두려움으로 입국심사대 앞에 섰다. 소련에 90대초 처음 선교 갔었을 때의 비슷한 감정의 묘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말이 없고 눈동자만 움직여 서로를 보는 눈초리는 그곳 분위기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세관통과를 하고 순안비행장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는 길에 개선문을 지나 조선혁명 박물관으로 갔다. 25M의 큰 동상과 좌우의 조각들은 혁명역사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하나하나의 조각들은 호전적이고 용감성 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우리를 인도하는 북한안내원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니 북한의 분위기를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평양시내의 대동강과 주체탑. 김일성 광장, 양각도 호텔 등이 보였다. 우리는 평양시내에 있는 해방산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북한은 외국 회폐 사용을 유로화로 하고 있다. 미국화폐가 있으면 먼저 인민폐를 유로화로 계산하고 다시 미국화폐 환산 한다. 호텔은 하루에 일인당 50유로이고 아침식사가 포함 된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에 고려호텔 식당으로 갔다. 냉면과 빈대떡. 토장국. 등 도착하여 첫 식사를 했다. 이곳의 음식 맛은 담백하고 맛이 있다.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조미료에 간장. 된장 같은 기본조미료가 오래 동안 묵혀 사용한다고 한다.
25일 주일아침. 우리는 칠골 교회에서 특송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아침에 호텔에서 “순교자의 길” 복음찬송을 연습하는데 호텔이 시끄러우니 장소를 옮겨 달라고 하여 만경대 밑에 위치한 김일성주석의 생가를 구경하고 언덕위에 만경대에 올라 말로만 들어보던, 셔먼호를 탄 선교사님의 피가 흘렸던 대동강을 내려보며 찬양 연습을 했다. 봉수교회는 확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도착한 칠골교회는 약 100여명의 교인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있고 카나다에서 온 외국인들도 있었다. 우리는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고 김광신목사님의 20분간의 인사말씀과 우리들의 특송이 있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울면서 찬양했고 그 감정은 긴 시간의 여운을 남겼다. 칠골교인들은 열열히 박수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한사람 한사람 손을 잡고 인사를 하였다. 예배후 우리는 G.M.I에서 1996년부터 운영하는 팔골 국수공장을 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공장책임자와 지배인 분들이 나와서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우리가 다 교회 다니는 것을 밝혀서 알고 있었다.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1996년 극심한 식량난으로 사람들이 굶주릴 때 그 당시 김광신 목사님께서 결단을 내려 평양에 국수공장을 세운것이다. 이곳서 만들어진 국수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 국수공장을 알고 있다. 성도님들의 후원이 이곳에서 수십만의 사람을 살렸다. 우리는 공장에서 직접 뽑아 낸 국수를 맞보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26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모두들 대동강 가를 산책하였다. 오염이 안 되고 차량들이 거의 없어서 공기는 폐 속 깊이 들어오는 느낌이다. 아침식사는 죽과 빵이 나오는데 꼬박 꼬박 세끼를 먹어도 끈기 있는 음식이 없어서인지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 대동강을 끼고 평양 중심에 위치한 김일성 주석의 70세 생일을 맞이하여 지은 170M 높이의 주체탑을 보았다. 1948년 우리나라 통일을 두고 김구선생과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쑥섬을 보고 대동강 변에 1968년 미국 함정 푸에블로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동해상에서 납포 되었는데 대동강에 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이곳에 1866년 제너널 셔만호의 비문이 있었다. 이곳은 영국의 하노브 교회에서 파송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님이 제너넬셔만호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붙잡혀서 참수형을 당한 곳으로 우리나라 교회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곳이다. 참수당하면서 목 자르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준 것이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저녁에 우리는 15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5.1경기장에서 아리랑공연을 참관하였다. 중.고 학생들 2만 명이 9개월 동안 연습하여 카드섹션을 하고 일반인들의 마스게임은 몇 만명이 동원 된 것 같다. 마스게임과 카드섹션의 내용은 일제치하에 만주벌판으로 피난길을 떠나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승리하여 돌아와서 조국건설과 미래의 컴퓨터 산업, 식생활개선. 농업개발 등을 이뤄 군사, 정치 경제의 강성대국을 이루 간다는 내용이다. 카드섹션에는“ 조국해방 60 돐 만세, 수령님그리움으로 사무치는 이강산,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 장군 만세”등을 볼 수 있었다. 5-7살 된 아린아이들의 “우리는 조국에서 부러움이 없어라”라고 외치는 소리는 표정이 없었다. 27일 화요일 우리는 묘향산으로 갔다. 우리나라 조선의 5대 명산인 묘향산에는 국제친선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은 김일성주석이 살아있을 때 외국 사절단들이 가지고 온 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가야하는 곳이다. 묘향산은 잣나무와 도토리나무, 산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고 한다.
28일 수요일 평양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서해 갑문이 나온다. 남포로 내려가는 도로는 김일성주석의 생일을 맞춘 42.15 KM 길이의 거리이다. 1998-2000년에 공사한 도로로 남녀 인원이 년 5만 명이 동원되어 망치로 돌을 쪼개고 마대로 나르고 하여 이룩한 10차선의 대 작업으로 이름하여 청년영웅 도로라고 부른다. 남포 항구는 남쪽에서 오는 모든 화물이 도착하는 곳으로 우리가 보내는 컨테이너도 이곳을 통하여 전달된다.
29일 목요일 남쪽으로 176KM에 있는 개성 판문점을 방문했다. 1953년 정전협정 장소로 전쟁을 마무리한곳으로 그 당시의 자료와 건물들을 돌아보았다. 6.25 전쟁은 유엔군의 북침과 항복했다는 안내원의 설명 비문이 있다. 우리는 남쪽의 판문각이 있는 바로 경계선 까지 가서 남.북 협상하는 공동구역 안의 집으로 들어가서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다. 수많은 인명피해와 건물의 파괴, 이산가족의 아픔이 있는 경계선에서 우리는 통일을 하루빨리 기원해본다. 돌아오는 길에 개성에서 내려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피가 묻어있는 선죽교다리를 보고 성균관을 돌아보며 옛날 선비들의 과거를 준비하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고려의 태조 왕건의 묘와 고려청자 박물관을 관람했다. 30일 금요일 G.M.I에서 1998 년부터 운영하는 사리원의 육아원을 가보았다. 처음에는 700명의 어린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생후 1주일에서 4살까지 350여명의 어린이가 있다. 한 방에 들어가니 2-3살 나이의 아이들이 25명 정도 어둑한 곳에 모여 “김정숙여사 찬양가”를 선생님 인도로 부르고 있었다. 한 아이씩 안아주니 놀라는 얼굴이다. 어머니라 부르며 살며시 손을 주는 아이도 있다. 금방 친해져 너도나도 안아달라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그곳 사역설명을 듣고 나왔다. 2층 베란다창살을 붙들고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배웅한다고 보는 2살되 보이는 아이들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서있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줄 날이 반드시 오길 주님께 소망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중국에서 국수공장 운영으로 밀가루를 살 때 이곳 육아원에 필요한 우유가루. 설탕가루. 기저귀감. 담요. 필요한 옷. 등등을 사서 보낸다. 항상 우리가 들어갈 때 피부병치료와 영양공급이 절실히 필요한 이곳 어린들을 위하여 필요한 비타민과 항생제. 피부약을 공급한다. 근처에 위치한 사리원 후원 국수공장으로 가서 현장을 관람하고 평양으로 돌아와서 그곳의 자랑거리인 옥류관에 들려 유명한 냉면을 맞보았다.
10월 1일 토요일 아침. 일주일의 일정을 잘 마치고 고려민항을 타고 북경을 통해 나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엄청난 축복임을 깊이 새기며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선한 일을 꿈꾸며 돌아왔다.
(그간 북한에 하나님사랑을 전하는 긍휼 사역에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많은 인원의 기독교인의 방문도 전례 없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은혜롭게 잘 시찰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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